
Life is half spent before we know what it is - George Herbert
인생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절반이 지나가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은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존재의 의미를 찾기란 어렵다. 나 자신도, 길가의 돌멩이도, 이 세상을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도 존재 자체에서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그것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유를 '존재의 의미'에서 찾으려 하면 불행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수준에서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의미 없는 존재들이 서로 엮이며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 존재가 본래 의미가 없더라도, 우리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의미는 실재하게 된다.
우주의 탄생부터 유기물, 그리고 생명체로의 진화 과정은 확률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빅뱅이라는 우주의 시작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유기물이 우연히 생겨났고, 또 우연히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단순한 원자들이 얽히고설키며 점점 더 복잡한 형태가 되었다. 탄소가 탄화수소가 되고, 모여서 아미노산이 되고, 단백질이 되고, 세포가 되고, 뇌가 되고, 온전한 생명체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특정한 목적 없이 확률적으로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수많은 확률의 과정을 거치고, 창발적인 속성을 갖게 됨으로써 존재들이 엮이고 비로소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창발은 단순한 것들이 모여 전혀 새로운 속성을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물 분자 하나는 '젖음'이라는 속성이 없지만, 수많은 물 분자가 모이면 젖음이 생긴다. 뉴런 하나는 의식이 없지만, 수십억 개의 뉴런이 연결되면 의식이 생긴다. 원자 하나하나는 의미가 없지만,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생명이 되고, 생명들이 관계를 맺으면 의미가 생긴다.
그런데 이 창발 과정에서 생명체는 특별한 속성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바로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다.
돌은 부서져도 아파하지 않는다. 원자는 흩어져도 슬퍼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명체는 다르다. 신경계라는 복잡한 구조가 창발시킨 의식은 고통이라는 경험을 만들어냈다. 배고픔, 외로움, 불안, 공포. 생존을 위해 진화한 이 감각들은 생명체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행복의 부재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애초에 의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태어난 존재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경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의식을 이 세계로 불러오는 것, 즉 출산은 정당한가?
우리는 앞서 의미 없는 존재들이 엮여 의미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존재하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하지만 출산은 다르다. 태어날 존재는 자신의 탄생에 동의할 수 없다. 부모가 아이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아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동의 없이 이 세계로 던져지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갖게 된다.
물론 삶에는 기쁨도 있다. 사랑, 아름다움, 성취감. 의식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긍정적 경험들. 하지만 여기에 비대칭성이 있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이런 기쁨의 부재를 박탈로 느끼지 않는다. 반면 존재하는 자는 고통을 실제로 겪는다.
태어나지 않는다면:
- 고통이 없다 (좋은 것)
- 기쁨이 없다 (나쁘지 않은 것, 박탈을 느낄 주체가 없으므로)
태어난다면:
- 고통이 있다 (나쁜 것)
- 기쁨이 있다 (좋은 것)
데이비드 베네타는 이 비대칭성을 근거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항상 더 낫다고 주장했다. 확률적으로 생겨난 생명이 창발을 통해 의식을 갖게 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윤리적 책임을 지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출산을 멈춰야 하는가?
Anti-natalism의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고통은 실재하고, 동의는 불가능하며, 비대칭성은 명확하다. 하지만 나는 이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몇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의미는 사후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Anti-natalism은 태어날 존재가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의미 부여의 순간은 반드시 탄생 이후에 온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은 존재한 이후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동의 없이 태어났다는 것이 문제라면, 우리가 지금 부여하는 모든 의미도 결국 동의 없이 시작된 삶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미를 무효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의미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한다.
둘째, 고통과 기쁨의 비대칭성은 경험의 영역에서만 성립한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기쁨의 부재를 박탈로 느끼지 않는다는 주장은 맞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는 고통의 부재를 안도로 느끼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대칭성 논증은 "고통을 피하는 것"을 절대적 가치로 놓는다. 하지만 왜 그것이 "기쁨을 경험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셋째, 관계와 의미는 개별 존재를 넘어선다.
Anti-natalism은 태어날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 개인이 겪을 고통, 그 개인이 할 수 없는 동의. 하지만 의미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부모와 자식, 친구와 친구, 연인과 연인. 이런 관계들은 개별 존재들이 엮이며 만들어내는 창발적 의미다. 한 생명의 탄생은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시작이다. 물론 그 관계 속에 고통도 있겠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의미도 분명 존재한다.
넷째, 생명은 단순한 고통-기쁨의 계산이 아니다.
Anti-natalism의 근본적인 한계는 삶을 공리주의적 계산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기쁨을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듯이. 하지만 삶의 가치는 그런 식으로 계산될 수 없다.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미를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출산은 무책임한 행위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큰 책임을 지는 행위다. 새로운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생명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 고통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 고통을 감당할 가치가 삶에 있다고 믿는 것.
확률적으로 생겨난 우리가 창발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냈듯이, 새로운 생명도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것이 내가 anti-natalism에 반대하는 이유다.
존재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불러오는 것은, 그 창발의 가능성을 믿는 행위다.